영산성지-사적지보기
영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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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영산 대학은 현재 익산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와 더불어 교단 교역자 양성의 교육기관이다. 1922년(원기 9년 익산에 총부를 정하고 불법연구회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였고, 이 해에 성지 영산에는 영산지부가 서울지부와 더불어 최초의 교당으로 발족하였다. 영산선원(영산대학의 전신은 1927년(원기 12년에 처음 영산학원으로 발족하여 정산종사와 주산종사가 1943년(원기 28년까지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일제 말의 혼란으로 수년간 중단했다가, 1947년 (원기 32년에 이군일, 박제봉 교무의 지도로 다시 개원했으나 6·25사변으로 다시 쉬지 않을 수 없었고, 1952년에 이중하 교무의 지도로 다시 개원했다가 1957년(원기 42년 영산재방언 공사로 휴원할 수 밖에 없었다. 반세기의 역사를 통하여 교단의 동량들을 길러오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단되기 세 번, 그야말로 민족의 수난사와 교단의 수난사를 함께 호흡하였다.
그러다 다시 발족한 것은 1964년(원기 49년 3월 1일이다. 당시 종법사이셨던 정산종사님의 뜻을 받들어 중앙선원, 동산선원과 함께 3대 선원으로 힘찬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중등반과 고등반 각 2년제로 병설 개원되어 교역자 양성의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영산 선원 초대 원장에 안이정 교무가 부임하여 선원발전의 기초를 형성해감에 따라 영산학원은 영산선원 개원 이전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초기 교단 인재 양성을 배출하고 또한 지역 사회의 문맹퇴치 등 영광 백수지역의 학교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원기 52년부터는 선풍 조짐을 위해 중등반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고등반 2년제를 초등 선원으로 제도 학정을 해나갔다.
원기 54년 3월 제 2대 오종태교무가 원장에 부임하여 그간 합산 운영되어오던 총부 영산 출장소와 영산지부(교당, 영산 선원을 각각 독립기관으로 체제를 분리하여 운영하고, 원훈을 제정하여 인재 양성 교육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원기 58년 윤주현교무가 교감으로 부임하여 오종태원장을 보좌하면서 당시의 숙원 사업이었던 전기 전화 수도시설 등 복지시설을 갖추었고, 이듬해 부산진교당 김법용심교도의 특별희사와 각 지방 호법동지들의 성원으로 원광원(지었을 당시 아래층은 여자 기숙사, 윗층은 강의실로 사용됨으로 신축하여 초급선원에 필요한 기본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원기 62년 윤주현 교무가 원장에 승진 취임하여 식당신축, 영산장학회 발족, 영모전 건립을 하였다.
원기 70년 12월 예비교역자 교육체제 개편시 [영산성지에는 교육기관이 있어야만 성지가 살고 교단의 근본정신을 길이 이어 받을 수 있다]는 대산종법사의 경륜을 받들어 교단에서는 2년제 초급선원이던 영산선원을 4년제 정규선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영산선원이 교단내에서만 자격이 인정되는 교욱기관이 되고 보니 졸업 후 많은 어려움이 있어 국가적인 자격 인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해, 원기 71년 11월 영산선원 문교부 인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원 자체내에서도 대학 시설에 필요한 도서관, 교수연구실, 강의실 등 기본 시설을 증축하고, 교육과정도 4년제 정규 대학에 준하여 운영하는 등 내적으로 대학인가 준비를 하면서, 원기 74년 2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해 11월 교정원에서는 영산선원의 교명을 「원불교 영산대학」으로 개명하여 교육기관의 성격을 사회적 이미지도 부각시켜 나아갔다. 한편 원기 72년부터 영산대학 문교부 인가 추진위원회들과 교단 관계인들이 직, 간접적으로 대학인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원기 73, 74년에 걸쳐 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으나 국가 정책으로 대학 설립인가를 보류해 오다가 75년 9월 다시 3차 인가서를 제출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설립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원기 78년 3월 12일 총 1,337평 규모의 교사(校舍와 운동장, 교수기숙사(영산출장소의 건물과 이전을 함으로써 윗동은 여자 교수 숙소로 아랫쪽은 남자기숙사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남서원관, 여서원관, 식당을 포함한 현 명칭 {원불교영산대학}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 다시 발족한 것은 1964년(원기 49년 3월 1일이다. 당시 종법사이셨던 정산종사님의 뜻을 받들어 중앙선원, 동산선원과 함께 3대 선원으로 힘찬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중등반과 고등반 각 2년제로 병설 개원되어 교역자 양성의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영산 선원 초대 원장에 안이정 교무가 부임하여 선원발전의 기초를 형성해감에 따라 영산학원은 영산선원 개원 이전까지 어려움 속에서도 초기 교단 인재 양성을 배출하고 또한 지역 사회의 문맹퇴치 등 영광 백수지역의 학교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원기 52년부터는 선풍 조짐을 위해 중등반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고등반 2년제를 초등 선원으로 제도 학정을 해나갔다.
원기 54년 3월 제 2대 오종태교무가 원장에 부임하여 그간 합산 운영되어오던 총부 영산 출장소와 영산지부(교당, 영산 선원을 각각 독립기관으로 체제를 분리하여 운영하고, 원훈을 제정하여 인재 양성 교육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원기 58년 윤주현교무가 교감으로 부임하여 오종태원장을 보좌하면서 당시의 숙원 사업이었던 전기 전화 수도시설 등 복지시설을 갖추었고, 이듬해 부산진교당 김법용심교도의 특별희사와 각 지방 호법동지들의 성원으로 원광원(지었을 당시 아래층은 여자 기숙사, 윗층은 강의실로 사용됨으로 신축하여 초급선원에 필요한 기본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원기 62년 윤주현 교무가 원장에 승진 취임하여 식당신축, 영산장학회 발족, 영모전 건립을 하였다.
원기 70년 12월 예비교역자 교육체제 개편시 [영산성지에는 교육기관이 있어야만 성지가 살고 교단의 근본정신을 길이 이어 받을 수 있다]는 대산종법사의 경륜을 받들어 교단에서는 2년제 초급선원이던 영산선원을 4년제 정규선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영산선원이 교단내에서만 자격이 인정되는 교욱기관이 되고 보니 졸업 후 많은 어려움이 있어 국가적인 자격 인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해, 원기 71년 11월 영산선원 문교부 인가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원 자체내에서도 대학 시설에 필요한 도서관, 교수연구실, 강의실 등 기본 시설을 증축하고, 교육과정도 4년제 정규 대학에 준하여 운영하는 등 내적으로 대학인가 준비를 하면서, 원기 74년 2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 해 11월 교정원에서는 영산선원의 교명을 「원불교 영산대학」으로 개명하여 교육기관의 성격을 사회적 이미지도 부각시켜 나아갔다. 한편 원기 72년부터 영산대학 문교부 인가 추진위원회들과 교단 관계인들이 직, 간접적으로 대학인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원기 73, 74년에 걸쳐 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으나 국가 정책으로 대학 설립인가를 보류해 오다가 75년 9월 다시 3차 인가서를 제출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설립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원기 78년 3월 12일 총 1,337평 규모의 교사(校舍와 운동장, 교수기숙사(영산출장소의 건물과 이전을 함으로써 윗동은 여자 교수 숙소로 아랫쪽은 남자기숙사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남서원관, 여서원관, 식당을 포함한 현 명칭 {원불교영산대학}을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