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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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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소태산 대종사의 생애와 업적을 길이 추모하고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원기 38년(1953년) 4월, 제 1대 성업봉찬사업의 하나로 세운 비석이다. 중앙충부 소태산 대종사 성탑 동남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문에는 대종사를 찬양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정산종사가 지었다.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병서
圓覺聖尊 少太山 大宗師 碑銘幷序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日月이 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生成의 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佛佛이 繼世하고 聖聖이 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의 은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이다. 옛날 靈山會上이 열린 후 政法과 像法을 지내고 季法 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增深하였나니 이것이 곧 救主이신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대종사의 성은 朴씨요 휘는 重彬이요 少太山은 그 호이시니 釋尊紀元 2918년 辛卯 3월 27일에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탄생하시었다. 父는 朴晦傾 母는 劉定天이시요 新羅始祖王와 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대종사 유시로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웅대하시며 모든 사물에 매양 사색의 정신이 많으시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용단력이 있으시었다.
9세시에 우주의 자연 현상을 보시고 큰 의심이 발하시었으나 그 억頭를 풀기로 한즉 생각이 막연하여 도저히 究竟處를 해득하기가 어려우매 대종사의 우울하신 심경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시사 처음에는 산신에게 다음에는 도사에게 의뢰를 구하여 보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필경은 晝宵一念이 오직 한 의심뿐으로 점점 計較頓忘하는 三昧의 경계에 드시시었으니 이 사이에 생활의 곤란과 심심의 피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26세 되시던 丙辰 3월 26일 이른 아침에 東天의 曙光을 보시고 정신이 문득 상쾌해지시며 積歲에 맺혓던 억頭가 풀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大覺을 이루시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前聖의 證悟處를 참고하기 위하사 저家의 경전을 열람하시다가 金剛經을 보시고 가라사대 석가모니 불은 진실로 聖中聖이라 하시고 이에 부처님에게 연원을 정하시고 다시 현시국을 관찰하시매 세도가 이미 위기에 당하여 그 救濟事業이 시급함을 생각하시고 처음 9인 제자을 얻으사 最初法語를 설하신후 靈肉雙全의 기초를 닦기 위하여 먼저 貯蓄組合을 설치하사 길룡리 海面의 于潟地를 개척하시고 無我奉公의 정신을 세우기 위하여 新禱誓願을 명하시었던바 9인이 한가지 血印의 신성을 바치었다.
己未 8월에 2, 3제자를 데리시고 錫杖을 扶安 蓬萊山에 옮기시어 5년간 주재하시며 敎理制度의 草案을 大略 마치신 후 甲子 4월에 下山하시어 總部를 此 신룡리에 건설하시고 佛法硏究會라는 임시 명칭으로 敎門을 공개하사 제자 수 10인으로 더불어 晝耕夜讀의 간고한 생활을 하여가며 교리 훈련을 시작하시었나니 교리의 대강은 一圓을 最高宗旨로 하여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는 동시에 千萬事理를 다 이에 통일케 하시고 四恩四要를 윤리로 하여 종전에 未達한 모든 윤리를 다 통하게 하시고 三學八條를 수행으로 하여 종전에 편벽되 일체 수해을 병지하게 하시며 다시 靈肉雙全 理事 行 處處佛像事事佛供 無時禪 無處禪 等 大諦를 밝히사 四通五達의 원융한 도로써 모든 법을 簡易能行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리 훈련을 실시하시는 일방 다시 생활 제도의 개선에 착수하사 虛禮刪削과 미신 타파며 自作自給과 收支對照 等 방법으로써 새로운 사업 기토를 쌓으사 春風秋雨 20여년에 夙夜動懇 하시와 日政의 압제와 싸워가며 모든 난관을 극복하시어 교단 건설에 오로지 심혈을 다하시더니 無常히 迅速하여 癸未 5월 16일에 대중을 모으시고 生死眞理의 大法門을 최후로 설하신 후 6월 1일에 날槃相을 보이시니 世壽는 53이요 開法이 28년이었다. 때에 徒衆들은 攀號 踊하여 그칠 줄을 몰랐고 일반 사회의 嗟嘆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 아니하였으며 虛空法界와 삼라만상이 다같이 오열하는 기상을 보이었다. 그 후 교단은 한결같이 先師의 유업을 이어 시국의 萬難을 겪으며 대중이 一心同進하던 중 乙酉 8월에 미족의 해방이 되자 新生國運의 발전과 아울러 교세가 점차 확창되매 丙戌 4월에 敎名을 圓佛敎라 정하고 이를 천하에 공시하였다.
오호라, 대종사는 일찍이 曠劫種聖으로 窮村邊地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修習이 없었으나 文理를 스스로 알으시고, 師長의 지도가 없었으나 大道를 自覺하시었으며 板蕩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萬能이 俱備하시었으며, 기상은 泰山喬嶽같으시나 春風和氣의 자비가 兼全하시고, 處事는 磊磊落落하시나 細細曲節의 진정을 통해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總攝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萬法에 施用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事事物物의 支流까지 통하시어 一圓大道의 바른 법을 十方三世에 한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바 百億化身의 如來시오 集群聖而大成이시라, 永天永地 千萬劫에 무량한 그 공덕을 萬一이라도 標記하기 위하여 이 돌을 세우고 이 銘을 지어 가로대,
奧若宗師 曠劫種聖 應化機緣救世徒衆 自修自覺 經路艱難 建敎事業
오약종사 광겁종성 응화기연 구세도중 자수자각 경로간난 건교사업
平地造山 一圓大道 萬法之母敎門通達 衆聖共會 二八年間 夙夜勤懇
평지조산 일원대도 만법지모 교문통달 중성공회 이팔년간 숙야근면
千萬方便 無量法門 法輪復轉佛日重輝 人天咸戴 六衆同歸 堅亘三際
천만방편 무량법문 법륜부전 불일중휘 인천함대 육중동귀 견항삼제
橫遍十方 雨露之澤 日月之明無邊功德 標以斯石 永天永地 慕仰無極
횡편시방 우로지택 일월지명 무변공덕 표이사석 영천영지 모앙무극
원기 38년 4월 26일 立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 비명병서
圓覺聖尊 少太山 大宗師 碑銘幷序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日月이 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生成의 道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佛佛이 繼世하고 聖聖이 相傳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의 은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이다. 옛날 靈山會上이 열린 후 政法과 像法을 지내고 季法 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增深하였나니 이것이 곧 救主이신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이다.
대종사의 성은 朴씨요 휘는 重彬이요 少太山은 그 호이시니 釋尊紀元 2918년 辛卯 3월 27일에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탄생하시었다. 父는 朴晦傾 母는 劉定天이시요 新羅始祖王와 朴赫居世의 후예이시다.
대종사 유시로부터 기상이 늠름하시고 도량이 웅대하시며 모든 사물에 매양 사색의 정신이 많으시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천하는 용단력이 있으시었다.
9세시에 우주의 자연 현상을 보시고 큰 의심이 발하시었으나 그 억頭를 풀기로 한즉 생각이 막연하여 도저히 究竟處를 해득하기가 어려우매 대종사의 우울하신 심경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시사 처음에는 산신에게 다음에는 도사에게 의뢰를 구하여 보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필경은 晝宵一念이 오직 한 의심뿐으로 점점 計較頓忘하는 三昧의 경계에 드시시었으니 이 사이에 생활의 곤란과 심심의 피로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으시었다.
26세 되시던 丙辰 3월 26일 이른 아침에 東天의 曙光을 보시고 정신이 문득 상쾌해지시며 積歲에 맺혓던 억頭가 풀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大覺을 이루시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前聖의 證悟處를 참고하기 위하사 저家의 경전을 열람하시다가 金剛經을 보시고 가라사대 석가모니 불은 진실로 聖中聖이라 하시고 이에 부처님에게 연원을 정하시고 다시 현시국을 관찰하시매 세도가 이미 위기에 당하여 그 救濟事業이 시급함을 생각하시고 처음 9인 제자을 얻으사 最初法語를 설하신후 靈肉雙全의 기초를 닦기 위하여 먼저 貯蓄組合을 설치하사 길룡리 海面의 于潟地를 개척하시고 無我奉公의 정신을 세우기 위하여 新禱誓願을 명하시었던바 9인이 한가지 血印의 신성을 바치었다.
己未 8월에 2, 3제자를 데리시고 錫杖을 扶安 蓬萊山에 옮기시어 5년간 주재하시며 敎理制度의 草案을 大略 마치신 후 甲子 4월에 下山하시어 總部를 此 신룡리에 건설하시고 佛法硏究會라는 임시 명칭으로 敎門을 공개하사 제자 수 10인으로 더불어 晝耕夜讀의 간고한 생활을 하여가며 교리 훈련을 시작하시었나니 교리의 대강은 一圓을 最高宗旨로 하여 이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하는 동시에 千萬事理를 다 이에 통일케 하시고 四恩四要를 윤리로 하여 종전에 未達한 모든 윤리를 다 통하게 하시고 三學八條를 수행으로 하여 종전에 편벽되 일체 수해을 병지하게 하시며 다시 靈肉雙全 理事 行 處處佛像事事佛供 無時禪 無處禪 等 大諦를 밝히사 四通五達의 원융한 도로써 모든 법을 簡易能行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교리 훈련을 실시하시는 일방 다시 생활 제도의 개선에 착수하사 虛禮刪削과 미신 타파며 自作自給과 收支對照 等 방법으로써 새로운 사업 기토를 쌓으사 春風秋雨 20여년에 夙夜動懇 하시와 日政의 압제와 싸워가며 모든 난관을 극복하시어 교단 건설에 오로지 심혈을 다하시더니 無常히 迅速하여 癸未 5월 16일에 대중을 모으시고 生死眞理의 大法門을 최후로 설하신 후 6월 1일에 날槃相을 보이시니 世壽는 53이요 開法이 28년이었다. 때에 徒衆들은 攀號 踊하여 그칠 줄을 몰랐고 일반 사회의 嗟嘆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 아니하였으며 虛空法界와 삼라만상이 다같이 오열하는 기상을 보이었다. 그 후 교단은 한결같이 先師의 유업을 이어 시국의 萬難을 겪으며 대중이 一心同進하던 중 乙酉 8월에 미족의 해방이 되자 新生國運의 발전과 아울러 교세가 점차 확창되매 丙戌 4월에 敎名을 圓佛敎라 정하고 이를 천하에 공시하였다.
오호라, 대종사는 일찍이 曠劫種聖으로 窮村邊地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修習이 없었으나 文理를 스스로 알으시고, 師長의 지도가 없었으나 大道를 自覺하시었으며 板蕩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萬能이 俱備하시었으며, 기상은 泰山喬嶽같으시나 春風和氣의 자비가 兼全하시고, 處事는 磊磊落落하시나 細細曲節의 진정을 통해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總攝하시나 분별은 오히려 역력히 밝히시고, 하나를 萬法에 施用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드러내사, 안으로는 無上妙義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는 事事物物의 支流까지 통하시어 一圓大道의 바른 법을 十方三世에 한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바 百億化身의 如來시오 集群聖而大成이시라, 永天永地 千萬劫에 무량한 그 공덕을 萬一이라도 標記하기 위하여 이 돌을 세우고 이 銘을 지어 가로대,
奧若宗師 曠劫種聖 應化機緣救世徒衆 自修自覺 經路艱難 建敎事業
오약종사 광겁종성 응화기연 구세도중 자수자각 경로간난 건교사업
平地造山 一圓大道 萬法之母敎門通達 衆聖共會 二八年間 夙夜勤懇
평지조산 일원대도 만법지모 교문통달 중성공회 이팔년간 숙야근면
千萬方便 無量法門 法輪復轉佛日重輝 人天咸戴 六衆同歸 堅亘三際
천만방편 무량법문 법륜부전 불일중휘 인천함대 육중동귀 견항삼제
橫遍十方 雨露之澤 日月之明無邊功德 標以斯石 永天永地 慕仰無極
횡편시방 우로지택 일월지명 무변공덕 표이사석 영천영지 모앙무극
원기 38년 4월 26일 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