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성지-사적지보기
이씨제각
관련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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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소태산 대종사는 1916년 4월 2일,26 년간의 구도끝에 대각을 이루었으나 인근의 지식인 몇 몇이 와서 문을 할 뿐 어리 석은 대중들은 이 세상을 구원할 새 주세불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대종사는 우매한 대중들을 깨우치기위하여 당시 영광일대를 휩쓸고 있던 증산교의 천제를 임시방편으로 삼아 대중들에게 대각하였음을 증험하기로 하고 7월 옥녀봉에서 천제를 올렸다.
천제에 모인 40여명은 천제를 올리고 난 후 대종사가 보여준 몇 가지 이적을 보고는 하늘의 뜻을 받은 어른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최초의 제자 40여명이 되었으나 이들을 교화시킬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현 영산 출장소에서 500미터 가량 떨어진 돛드레미(범현동이란 이름은 일제가 개명한 이름이다는 행정상으로 길룡리 내에 있는 마을이다. 돛드레미 이씨제각은 이곳에 있는 전주이씨의 제각으로(제각의 관리는 팔산종사가 하였고 법을 설한 곳은 맨 오른쪽 방이다 대종사 대각후에 사람들을 모아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최초법어로 설하고 교화를 시작한 처음 장소이다. 제일 처음 내린 [최초법어]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이 곳에서 한 것이다.
대종사는 대각후 외모에는 변화가 일어나 그간의 병은 없어지고 얼굴이 윤활하여진 안광(顔光이 빛나서 사람들이 놀란 정도로 변하였고 하시는 말씀도 보통 사람들의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인으로 생각했던 처지라 대종사를 참으로 알아보는 사람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종사는 그간 믿고 따르는 사십 여 명의 제자 가운데서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골라서 표준제자로 삼고 이 아홉 사람과 함께 저축조합을 만들었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심하여 민생의 삶이 도탄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도 길룡리 사람들의 생활은 변변한 논밭이 없는데다가 생업이 될만한 다른 방도도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민중들에게 새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고 새 길을 개척해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과 신앙을 병행하는 길이 앞으로 새 시대를 이끌 종교의 길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영육쌍전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돛드레미 이씨제각은 인류가 나아갈 새 방향으로 최초법어를 설하고 그 첫 사업으로 저축조합을 조직한 교단 최초의 교화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교단 초기 집회장소는 이씨 제각에서 방언공사 때에는 강변주점으로 옮겨 두 곳을 사용하였으며, 원기 3년 구간 도실이 완공된 뒤에는 모든 집회가 구간도실에서 이루어졌다.
대종사는 우매한 대중들을 깨우치기위하여 당시 영광일대를 휩쓸고 있던 증산교의 천제를 임시방편으로 삼아 대중들에게 대각하였음을 증험하기로 하고 7월 옥녀봉에서 천제를 올렸다.
천제에 모인 40여명은 천제를 올리고 난 후 대종사가 보여준 몇 가지 이적을 보고는 하늘의 뜻을 받은 어른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최초의 제자 40여명이 되었으나 이들을 교화시킬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침 현 영산 출장소에서 500미터 가량 떨어진 돛드레미(범현동이란 이름은 일제가 개명한 이름이다는 행정상으로 길룡리 내에 있는 마을이다. 돛드레미 이씨제각은 이곳에 있는 전주이씨의 제각으로(제각의 관리는 팔산종사가 하였고 법을 설한 곳은 맨 오른쪽 방이다 대종사 대각후에 사람들을 모아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최초법어로 설하고 교화를 시작한 처음 장소이다. 제일 처음 내린 [최초법어]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을 이 곳에서 한 것이다.
대종사는 대각후 외모에는 변화가 일어나 그간의 병은 없어지고 얼굴이 윤활하여진 안광(顔光이 빛나서 사람들이 놀란 정도로 변하였고 하시는 말씀도 보통 사람들의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인으로 생각했던 처지라 대종사를 참으로 알아보는 사람을 그리 많지 않았다.
대종사는 그간 믿고 따르는 사십 여 명의 제자 가운데서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골라서 표준제자로 삼고 이 아홉 사람과 함께 저축조합을 만들었다. 당시는 일제의 수탈이 극심하여 민생의 삶이 도탄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도 길룡리 사람들의 생활은 변변한 논밭이 없는데다가 생업이 될만한 다른 방도도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민중들에게 새 삶의 방향을 일깨워주고 새 길을 개척해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과 신앙을 병행하는 길이 앞으로 새 시대를 이끌 종교의 길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영육쌍전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돛드레미 이씨제각은 인류가 나아갈 새 방향으로 최초법어를 설하고 그 첫 사업으로 저축조합을 조직한 교단 최초의 교화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교단 초기 집회장소는 이씨 제각에서 방언공사 때에는 강변주점으로 옮겨 두 곳을 사용하였으며, 원기 3년 구간 도실이 완공된 뒤에는 모든 집회가 구간도실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