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지-사적지보기
고산정과 백세각
관련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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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
지정년도 |
상세설명 DESCRIPTION
야성 송씨 30대 손인 정산종사는 살아 생전에 당신 고향을 묻는 이 있으면 [성주 고산성]이라 했다. 고산정은 야성 송씨의 집성촌으로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이다. 정산종사 부친 송벽조가 결혼 때 까지 살던 곳이며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세거하였고 오늘날까지 종친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정산종사 조부에게 유학을 배웠으나 14세경부터는 일년에 한 철씩 이곳 고산정에 와 공산 송준필에게 유학을 배우게 되었다. 정산종사 14대조인 송희규가 고산정에 정착하여 백세각을 짓고 학문을 닦던 이곳에서 공산 송준필은 고양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영남지방의 거유로 이름이 나 있었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저서와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고산정은 3.1운동 당시 성주지방의 항일 운동의 요람이었다. 공산 송준필이 주동한 이 운동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유림이 한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을 개탄해 독립 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송준필, 송흥래 2인은 김창숙 등과 연락,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했던 [유림단진정서] 작성에 앞장서 송준필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후에 종친 10여명이 독립유공인으로 추서되었다. 송준필이 만년에 저술과 경학에 힘쓰던 김천 원계서원에 숭덕사를 짓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백세각은 조선조 전통 목조건물로 인정되어 경북 지방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세각은 그대로 있으나 정산종사 송준필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웠던 백세각 옆 고양서당은 이젠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산종사가 14,5세경에 지었다는 [해붕천리 고상우(海鵬千里 고翔羽) 농학십년 칩울신(籠鶴十年 蟄鬱身)(바다붕조 천리 날아갈 그런 깃을 가지고도 조롱 속에 갇힌 학으로 10년의 세월을 보내는구나)]이라는 시구를 보고 송준필 선생도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게되었다 한다.
백세각에서 조금 떨어진 고산정 닭실마을에 있는 단구재는 야성 송씨 21세손인 단구공 송세필의 사당이다. 정산종사 열반에 들자 장례를 마친 후 익산에 사는 가족과 시자가 고향 성주 고산정을 찾아 단구재에 참배하고 집안 친지들에게 인사를 한 후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다. 정산종사 문중에서는 이곳 단구재에 정산종사 진영을 모셔놓고 새회상의 문호를 열어가고 있다.
정산종사 조부에게 유학을 배웠으나 14세경부터는 일년에 한 철씩 이곳 고산정에 와 공산 송준필에게 유학을 배우게 되었다. 정산종사 14대조인 송희규가 고산정에 정착하여 백세각을 짓고 학문을 닦던 이곳에서 공산 송준필은 고양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영남지방의 거유로 이름이 나 있었고, 일생을 통해서 많은 저서와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고산정은 3.1운동 당시 성주지방의 항일 운동의 요람이었다. 공산 송준필이 주동한 이 운동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유림이 한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을 개탄해 독립 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송준필, 송흥래 2인은 김창숙 등과 연락,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했던 [유림단진정서] 작성에 앞장서 송준필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후에 종친 10여명이 독립유공인으로 추서되었다. 송준필이 만년에 저술과 경학에 힘쓰던 김천 원계서원에 숭덕사를 짓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백세각은 조선조 전통 목조건물로 인정되어 경북 지방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세각은 그대로 있으나 정산종사 송준필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웠던 백세각 옆 고양서당은 이젠 흔적도 없고 그 자리에 조립식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정산종사가 14,5세경에 지었다는 [해붕천리 고상우(海鵬千里 고翔羽) 농학십년 칩울신(籠鶴十年 蟄鬱身)(바다붕조 천리 날아갈 그런 깃을 가지고도 조롱 속에 갇힌 학으로 10년의 세월을 보내는구나)]이라는 시구를 보고 송준필 선생도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게되었다 한다.
백세각에서 조금 떨어진 고산정 닭실마을에 있는 단구재는 야성 송씨 21세손인 단구공 송세필의 사당이다. 정산종사 열반에 들자 장례를 마친 후 익산에 사는 가족과 시자가 고향 성주 고산정을 찾아 단구재에 참배하고 집안 친지들에게 인사를 한 후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였다. 정산종사 문중에서는 이곳 단구재에 정산종사 진영을 모셔놓고 새회상의 문호를 열어가고 있다.